꿈깨! 영속기업은 없다 (ZD넷 코리아)
판타지 SF 영화의 소재로 가끔씩 ‘영생을 꿈꾸는 악당’이 등장한다. 치졸한 권모술수로 마침내 영약을 손에 쥔 악
당은 약병을 벌컥들이키지만 , 외마디 비명과 함께 순간 한줌의 재로 사그라진다. 중국 진시황도 주변에 영생의 약을
파는 약장수가 판을 쳤다고 하지만, 수은 중독으로 40세에 요절했다는 야사가 전해진다.
영화와 고전에는 이렇게 영생을 꿈꾸는 일이 얼마나 부질 없는 짓인지 상기시켜 주지만, 이상하게도 이러한 통찰이
기업 세계에서는 증발해 버렸다. 은퇴를 선언한 창업자가 ‘영속하는 기업’을 후배에게 당부하는 신문 기사를 때때
로 보게 된다. 자신이 평생의 노력으로 일군 회사의 영속을 원하는 그의 충정은 충분히 이해가 되기는 하지만 남은
후배에게 현명함을 전하려면 그 너머를 보아야 한다.
회계학에 계속사업(going concern)이라는 용어가 있다. 재무제표를 감사하는 회계사는 회사가 내년에도 꾸준히 사업
을 계속할 것으로 가정하고 기업의 재무제표를 검토한다. 조만간 회사가 망할 것이라면 미래가치가 반영된 재무제표
를 평가하는 일은 적정하지 않기 때문에 회계사가 대상기업의 계속사업을 상정하는 일은 당연하다. 그러나 계속사업
에 의문이 들 경우, 회계사는 청산가치를 기준으로 기업의 재무제표를 감사해야 한다. 법원도 법정관리 기업의 존속
여부를 결정할 때, 청산가치보다 계속사업의 가치가 훨씬 커야 존속을 결정한다.
계속사업에 대한 정치사회학 용어는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이다. UN은 사회의 지속가능한 발전에 대하여 ‘미래
세대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능력을 위태롭게 하지 않고, 현 세대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발전’으로 정의했다. 이
러한 관점으로 조직의 지속가능성을 정의한다면 ‘미래의 니즈를 충족시킬 역량을 약화시키지 않으면서 현재 니즈를
충족하여 계속사업을 유지하는 정도’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속가능성의 달성은 예측한 시간을 지나봐야 확인할 수 있으니 현 시점에서는 측정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많
은 경영인들이 이를 무시한다. 부실 채권을 남발하고 과도한 투자로 미래의 니즈를 앞당겨 써 버린다. 당장 활용할
자산이 부족하여 미래에 활용해야 할 신용자산을 미리 사용한다면 회사의 미래는 없다. 굴지의 기업들이 지속가능성
에 실패한 이유는 현재와 미래의 균형을 못 맞추었기 때문이다.
양자물리학에 임계질량(critical mass)이라는 말이 있다. 원자구조가 불안전하여 핵분열이 일어나는 물질도 폭발이
되려면 일정 규모의 질량(임계질량)이 있어야 한다는 이론이다. 임계질량(臨界質量)은 우라늄과 같은 핵물질이 핵 연
쇄 반응으로 자체적 폭발이 가능한 최소 질량을 말한다. 양자물리학과 달리 조직은 규모가 커지고 관료적 구조가 강
화 됨에 따라 역으로 활력은 떨어지고 혁신은 사라진다. 그러므로 조직의 임계질량은 혁신이 안 일어나는 조직규모로
정의해야 할 듯하다. 조직이 일정 규모가 되면 예외 없이 활력은 떨어지고 고착화된 관료주의가 자리를 잡는다. 외부
에서 관찰되는 관료적 기업문화의 특징은 높은 자만심이다.
오래전 참석한 해외 컨퍼런스에서 자만심 지수(pride index)를 들은 적이 있다. 화면에는 우리회사를 포함하여 컴퓨
터 업계의 다국적기업 3개 회사의 자만심 지수곡선이 시간대 별로 그려져 있었다. 강사는 자만심 지수가 정점에 찍힌
시점부터 3년 후에 그 기업은 예외 없이 위기에 빠진다고 경고했다. 그의 예언대로 한 회사는 데이터베이스 업체에
합병되고, 또 다른 회사는 여러 개로 분사했으며, 어떤 회사는 40%의 직원을 구조 조정했다.
크리스텐슨(Clayton Christensen)은 ‘혁신기업의 딜레마’라는 책에서 기업의 고착화된 성공 관행이 얼마나 생존에
해로운지 설파했다. 시장에 나타난 파괴적 기술은 시장을 재편한다. 파괴적 환경에 부딪히면 기존의 성공 관행은 순
식간에 쓸모 없어진다. 기업은 태어나고 성장하지만, 시간 차는 있을지언정 언제나 새로운 혁신 기업에게 자리를 빼
앗긴다. 조직이 활력과 혁신에 실패하면 회사의 미래가 사라진다. 현명한 경영자는 어쩌면 영원히 달성 불가능한 목
표, 즉 끊임 없이 혁신을 유지하는 기업 문화를 지키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경영자는 조직활력과 임계질량의 관계에 대한 통찰을 가지고, 성장단계에 맞춘 기업 혁신을 적절하게 북돋
아야 한다. 모든 회사가 정확히 맞아 떨어지지는 않겠지만 구성원의 숫자가 20명이 넘으면 기능분화, 40명에서는 재
무 시스템의 도입, 100명에서는 다양한 제품 포트폴리오 역량, 200명은 책임회계 제도, 400명은 프로세스 표준화,
2,000명은 글로벌 생산체제의 구축과 같이 조직 임계질량이 유발하는 도전을 해결해내야 성장한다. 그러나 대개의 경
우 일정한 임계질량에 도달한 조직은 자만심과 관료화, 혁신의 브레이크, 그리고 계속사업의 종말과 같은 사이클이
빠진다. 이런 현상은 조물주가 미리 정해놓은 운명처럼 어느 기업도 피해가 수 없다는데 문제가 있다.
과학자가 현재까지 발견한 영생에 가까운 동물은 히드라, 홍해파리, 해삼, 바다가재 등이 있다고는 하지만, 지능이
있는 고등동물의 사례는 드물다. 동물이 고등해지는 만큼 환경적응이 쉽지 않아 영생이 어렵다는 이야기이다. 기업도
성공하여 커지고 고등해지면 그만큼 환경적응이 어려워진다. 자연계의 고등동물은 부질없는 영생에 목숨 걸지 않고,
자신의 학습내용과 건강한 유전자를 후손에 전하는 생식 방법을 선택했다. 기업 역시 갈수록 커지는 몸집을 유지하는
영생을 꿈꿀 일이 아니다. 기업가 정신과 사내창업을 고취하여 새롭게 시장을 창출하고, 세상을 바꾸려는 젊은 리더
들을 양성하여 세대를 건너 진화해 나가는 재생산(reproduction)이 지혜로운 일이다.
[이정규 IT컬럼니스트]
※ 출처 : [이정규 칼럼] 꿈깨! 영속기업은 없다 (ZD넷 코리아)
※ 링크 : https://www.zdnet.co.kr/view/?no=20191220104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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